<애드센스> 명당 중의 명당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이야기-고종황제의 조부,흥선대원군의 부 –남연군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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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명당 중의 명당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이야기-고종황제의 조부,흥선대원군의 부 –남연군 묘소

 

 

최근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

인기 중에 방송 중이다.

바람과 구름과 비’ 7회에서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묘를 이장한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시대 후기로 갈수록 왕족 남자가 아주 귀했다.

12대 인종, 13대 명종, 24대 헌종,

25대 철종은 후사가 없었다.

 

한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계보를 보면

16대 인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으로부터

복녕군-의원군-안흥군-이진익-이병원- 남연군

-흥선대원군에 이르기까지 족보상으로 보면 6대손이 된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21대 영조의 계보가 된 것은

남연군이 어릴 때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인

은신군에게 양자로 입적되었기 때문이다.

 

영조의 계보는 영조에서 정조- 순조-헌종으로

이어지다가 24대왕인 헌종도 후사가 절손되었다.

헌종은 8세에 즉위하여 안동 김 씨와

풍양 조 씨의 권력투쟁에 휘말려 제대로

왕의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세도정치의 절정을 이루었던 안동김씨는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유지하기 위해

강화도에 유배되어 농부로 살고 있던 은언군

(영조의 손자, 정조의 아우)의 손자인

전계대원군의 셋째아들 강화도령 원범을

25대왕(철종)25대 왕(철종)으로 보위에 오르게 한다.

 

그러나 철종마저도 후사 없이 죽게 되자

종친 중 남연군의 손자이며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재황을 26대 고종으로 보위에 오르게 된다.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이 26대 왕으로 오른 것은

전적으로 흥선대원군의 공덕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야먕이 아주 큰 사람이었다.

 

안동 김 씨가 세상을 휘어잡고 횡포를 부리던

그때 흥선군 이하응은 안동 김 씨를 속이고

살아남기 위해 안동 김 씨에게 구걸을 하기도 하고

어리석은 듯, 아둔한척 하면서 몸을 낮추고 때를 기다리며 살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풍수지리 공부를 하며

전국의 명산이란 명산은 빠뜨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안동 김 씨의 세상에서 실권을 잃은 이 씨 가문의

명예와 무너진 왕권을 회복하고 실권을 잡기 위해서

이하응은 아버지 묘를 명당으로 이장하리라 결심하였다.

 

그렇게 10여년을 찾아다녔으나 마음에 드는

명당을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어느 날

정만인(鄭萬仁)이라는 지관을 만나게 되었다.

정만인은 당대 최고의 지관이었으며 도인이었다.

 

정만인은 흥선군과의 대화를 통해서 안동김씨를 제거하고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흥선군의 염원을 알게 되었고

그의 애국심에 감복하여 덕산 가야산 동쪽에 있는

이대 천자 지지 명당자리를 알려주게 되었다.

그러면서 정만인은 덕산 가야산 명당에 묘를 쓰면

10여년 안에 틀림없이 한 명의 제왕이 날 것이요,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만대 영화 지지(萬代榮華之地)가(萬代榮華之地)가 있는데

이 두 자리 중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때 흥선군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덕산 가야산의 이대 천자 지지(二代天子之地)를(二代天子之地) 선택했다.

그렇게 되어 남연군묘가 이대 천자 지지 명당에 옮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장과정은 순조로웠던 것만이 아니었다.

명당자리에는 이미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고

묘를 써야 할 자리에는 5층 석탑이 서 있었다.

그 석탑과 가야사절을 옮기고 남연군묘를 이장하였다.

 



정만인은 묘자리를 쓸 때 미리 도굴을

예언하면서 석회를 엄청 많이 붓게 했다.

묘를 다  쓴 다음 정만인은 흥선대원군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도망을 갔다..... ...

 

이대천자지지명당에 남연군 묘를 옳기고

18년 후 흥선군의 둘째아들 명복이 26대 고종,

손자가 27대 순종으로 조선의 왕이 되었고 

조선은 일본에게 망하고 이씨조선은

500년 역사의 끝을 마무리한다.